수곡리마을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왕피천 건너 성류굴이 있고 서쪽은 통고산맥(通古山脈)이 동쪽으로 뻗어 한티재(寒汰嶺)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구산리(九山里)가 있고 북쪽은 한티령의 지맥(支脈)이 마을 뒤를 둘러싸고 있으며 산 너머에는 행곡리가 있습니다.
마을의 역사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에 속하는 수곡 마을은 남강변에 자리한 평지마을로,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있어 마을 이름을 ‘수곡’이라 합니다.
1850년 경 울진 임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막금동, 두전동, 비월전동이 통합되어 수곡리로 개편되었습니다.
수곡리 막금마을은 마을을 둘러싼 야산과 왕피천이 “비단으로 둘러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두전마을의 이름은
“마을 앞산 위로 바라보이는 북두칠성이 언제나 마을을 비추고 지켜준다”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을 이야기
[성황당]
수곡 2리 초입에는 성황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황은 마을의 수호신을 뜻합니다. 서낭당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역대 최악의 태풍이라 불리우는 2002년 ‘루사’가 왔을 당시에 옆 논, 밭은 물이 다 차도 이곳만은 차지 않을 정도로 자리가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성황당 앞에는 ‘금사 줄’이 있습니다. 제 올리는 사람들인 유사 이외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놓은 것입니다. 수곡리의 성황당은 1600여 년
경부터 성황신을 모셔왔다고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700년 경에 강원도 감찰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려는데, 말이 그 길목에서
멈춰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내려서 성황당에 절을 했더니 그제서야 말이 움직였다는 말이 전해 내려옵니다. 이곳의 성황당에서는 정성을 다해 제를 지냅니다.
“제를 잘못 드리면 호랑이가 내려와 자꾸 괴롭힌대요. 그래서 사고가 난다던지 하면 다시 또 제를 드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 곳에 모시는
신의 이름을 ‘성황 할매, 황씨 할매’라고 부릅니다.
[격암 남사고 선생]
프랑스에 노스트라다무스가 있다면 한국에는 격암 남사고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천문, 지리, 관상 등에 통달했습니다. 격암은 호이고 이름은 사고입니다.
1509년 울진 수곡리 누금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조 초, 천문·지리·역학에 깊은 조예를 인정받아 관상감 천문교수에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렸습니다. 명종 때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직에 있었습니다. 1557년에 미리 선조8년의 동서분당과 1592년의 임진왜란을 예언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연려실에 ‘남사고는 명종때 사람입니다. 강원도에 살았는데 풍수, 천문, 복서, 상법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결’을 알아서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맞추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남사고 선생은 일반인에게 유학자가 아닌 천문지리학자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학문적 연원과 철학적 뿌리를 유학에 근거하고 있는 16세기 울진의 대표적인 유학자입니다. 죽은 다음에 지역민들이 표상으로 삼아서 서원을 세웠습니다.
서원의 표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선생이 유학에도 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북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07년도 격암 남사고가 태어난
생가로 전해져 오는 곳에 사당, 강당, 서재를 짓고 주변에 휴식공간이 조성되었습니다. 조선 최고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그의 선친 묘에 많은 풍수지리학자들이
찾아 옵니다. 한티재 길을 따라 올라가 굽이굽이 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정돈되지 않은 옛 묘 하나가 보입니다.
100년 정도된 무연고 묘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면 탁트인 전경이 펼쳐진데 자리한 ‘남사고 선친 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곳에 자리하기 까지 세 번의 묘 이장을
했다고 합니다. 최고의 묘자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한 번은 “아홉룡이 구슬을 다툰 것이 아니라 아홉뱀이 개구리를 다툰 것”이었고 또 한번은 “비룡이 등천함이 아니라
마른뱀을 나무에 걸어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발복을 바라고 오늘도 남사고 선생의 선친 묘를 찾습니다.